북한이 한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정한 가운데 북일관계는 남북관계와 다른 경로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한국과의 민족·통일 담론을 폐기했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별도의 외교 상대국으로 다뤄왔다. 이에 따라 북일관계는 납치 문제와 핵·미사일,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국가 간 협상 구도로 남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한국을 통일 상대에서 제거하는 대남노선이다. 일본까지 적대적 두 국가론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다. 북한으로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차단하면서도 미국·일본과는 필요에 따라 개별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북한이 북미관계를 핵보유국 간 협상으로 전환하려 한다면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국교 정상화와 경제적 보상을 주요 목표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북한이 아직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주요 국가이며, 양국 관계의 기본 틀은 2002년 평양선언에 남아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채택한 평양선언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국교 정상화 이후 경제협력,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해결, 납치 문제에 대한 조치 등이 담겼다.
이후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관계 개선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일본이 요구한 나머지 피해자들의 귀국과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협상은 사실상 중단됐다.
현재 일본 정부는 북일관계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납치와 핵·미사일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도 평양선언에 따라 납치 문제와 북한의 핵·미사일, 불행한 과거의 청산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기존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사안은 납치 문제다.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북한 납치 피해자는 17명이다. 이 가운데 5명은 2002년 귀국했지만 일본 정부는 나머지 12명의 귀국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일부가 사망했거나 북한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령화도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일본 총리가 조건 없이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지는 배경이다. 일본 정부는 정상 간 결단 없이는 장기간 교착된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북한에도 일본과의 대화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면 과거사 청산에 따른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장기화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외교적 고립을 완화하고 협상 공간을 넓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을 배제한 채 일본과 직접 협상할 경우 한미일 대북 공조에 균열을 낼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북미대화와 북일대화를 각각 추진하면서 한국의 중재 역할을 축소하고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개별적인 양보를 끌어내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일대화의 문턱은 높다. 북한은 납치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일본이 납치 문제를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로 제시하면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양측 모두 정상회담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지만 의제 설정 단계부터 충돌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 문제도 걸림돌이다. 북한은 일본 전역을 사정권에 둔 중거리·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 상공을 통과하거나 주변 해역에 떨어지는 미사일을 여러 차례 발사했다.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직접적인 국가안보 위협으로 판단한다.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미국과 군비통제 협상을 추진하더라도 일본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북한 핵무기와 중거리 미사일은 미국 본토보다 일본에 더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제한을 우선하고 중·단거리 미사일 문제를 뒤로 미룰 경우 일본의 안보 불안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다카이치 정부가 한미일 안보협력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미국과 북한의 미사일 경보정보를 공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제재 이행, 북한의 불법 해상 환적과 사이버 범죄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북일관계에는 대화와 압박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일본은 납치 피해자의 귀국을 위해 정상회담을 추진할 필요가 있지만 핵·미사일 위협과 대북제재를 외면할 수도 없다. 북한 역시 일본의 경제협력에는 관심을 보이면서 납치 문제의 재조사나 비핵화 요구는 거부하고 있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북일관계에도 새로운 변수를 만들었다. 북한이 한국을 통일의 상대가 아닌 적대국으로 분리하면서 일본과의 협상은 남북관계와 무관한 양자 외교로 추진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북일대화를 촉진할 수 있지만 한국을 배제한 채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일본만을 상대로 협상하려는 구도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한국에는 북일대화 자체보다 협상의 내용이 중요하다. 납치 문제 해결과 긴장 완화는 긍정적이지만 일본이 자국민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나 한국의 안보 이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뿐 아니라 한국인 납북자와 국군포로, 억류자 문제도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일관계의 돌파구는 결국 북한이 납치 문제에 대해 검증 가능한 조치를 내놓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일본도 정상회담 개최 자체를 성과로 삼기보다 피해자 귀국과 핵·미사일 위협 감소로 이어질 구체적인 합의를 확보해야 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아래에서 일본은 북한에 경제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협상 상대인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직접적인 적국에 가깝다. 대화의 필요성과 안보 위협이 공존하는 이중 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한 북일관계는 정상회담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거론되면서도 실질적인 진전을 내기 어려운 상태가 이어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