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선언한 ‘적대적 두 국가론’…민족·통일 지우고 대결 체제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것은 기존 통일노선의 수정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이다. 같은 민족이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틀을 폐기하고 한국을 독립된 적대국이자 전쟁 상대국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2023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가 더 이상 동족관계나 동질관계가 아니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굳어졌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며 대남정책의 전면적인 전환도 지시했다.
이듬해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한발 더 나아갔다. 북한 헌법에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과 같은 표현을 삭제하고 한국을 ‘제1의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도록 주문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한국을 완전히 점령해 북한 영토에 편입하는 문제도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은 선언을 제도와 조직 개편으로 옮겼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을 담당했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도 조직과 기능이 축소·개편됐으며 관영매체와 선전물에서는 ‘통일’과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평양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도 철거됐다.
물리적인 남북 단절 조치도 이어졌다. 북한은 남북 연결 도로와 철도에 지뢰를 매설하고 방벽을 쌓았으며 2024년 10월에는 경의선·동해선의 북측 구간 일부를 폭파했다. 북한은 이 조치가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정한 헌법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 헌법에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반영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한 셈이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평화적 공존을 전제로 하는 일반적인 두 국가론과 구별된다. 서로의 국가성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구상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와 통일이라는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군사적 대결을 국가 간 적대관계로 고착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북한으로서는 이 노선을 통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대남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할 수 있다. 같은 민족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내부적 모순을 없애고 한국을 별도의 적국으로 규정함으로써 핵전력의 대남 운용 논리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 통제 목적도 거론된다. 북한 주민에게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생활상을 같은 민족의 성취가 아니라 적대국의 현실로 인식시키면 체제 비교에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남북 교류와 통일에 대한 주민의 기대를 차단하고 장기적인 대결 체제에 동원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헌법 체계와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국가의 책무로 명시하고 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역시 남북관계를 국가 간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두 국가를 선언했다고 해서 남북관계의 법적 성격이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이 통일과 민족이라는 표현을 제도적으로 지우고 접경지역 단절과 군사적 적대화를 추진하면서 기존 남북관계의 기반은 크게 약화됐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북한이 통일을 포기했다는 선언에만 머물지 않는다. 남북 사이의 충돌을 민족 내부의 분쟁이 아닌 국가 간 전쟁으로 규정하고 핵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안보의 위험성을 높이는 전략적 노선이다. 남북 간 연락망과 군사적 안전장치마저 사실상 사라진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을 막을 최소한의 위기관리 체계를 복원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