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이 항구에 정박하거나 국제 관함식에 참가할 때 선수에서 함미까지 형형색색의 깃발이 줄지어 걸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삼각형과 사각형, 길쭉한 형태의 깃발이 뒤섞여 있으며 빨강·파랑·노랑·흰색 등 색상도 다양하다.
흔히 ‘만국기’라고 부르지만, 군함에 걸리는 이 깃발들은 반드시 세계 각국의 국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해상 신호기이며,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에는 해군의 오랜 역사와 통신 기술의 발전 과정이 담겨 있다.
만국기가 아니라 국제해상신호기
군함을 장식하는 깃발은 해군에서 일반적으로 만함식(滿艦飾·Dressing Ship)에 사용하는 신호기다.
국제해상신호기는 국제신호서(International Code of Signals)에 따라 알파벳 26개를 나타내는 문자기, 숫자를 나타내는 숫자기, 대체기 등으로 구성된다.
각 깃발은 서로 다른 색상과 도형을 사용해 먼 거리에서도 구별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대표적으로 알파벳 A를 뜻하는 신호기는 흰색과 파란색으로 구성된 제비꼬리 모양이며, B는 붉은색 사각형, C는 파란색·흰색·붉은색의 가로줄 무늬로 구성된다.
모양이 서로 다른 이유는 단순한 장식 효과 때문이 아니다. 바다에서는 거리와 날씨, 빛의 방향에 따라 색상을 식별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색상뿐 아니라 무늬와 형태를 조합해 식별력을 높인 것이다.
삼각형과 사각형, 제비꼬리 모양의 차이
국제해상신호기는 크게 사각형, 제비꼬리형, 삼각형 등의 형태를 사용한다.
문자기는 대체로 사각형이지만 A와 B처럼 예외적인 형태도 있다. 숫자기는 길쭉한 삼각형 형태의 페넌트가 사용된다. 이처럼 형태를 구분하면 깃발의 종류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색상 역시 임의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국제해상신호기에는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흰색 등이 주로 사용되며, 대비가 뚜렷한 색상과 기하학적 무늬를 조합한다.
예를 들어 노란색과 파란색이 대각선으로 나뉜 O 신호기와 노란색·파란색이 가로로 나뉜 K 신호기는 비슷한 색상을 사용하지만 배치가 달라 서로 구분할 수 있다.
깃발 하나로 위험과 구조 요청까지 전달
무선통신이 발달하기 이전, 선박 간 의사소통에서 신호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제신호서에 따르면 특정 깃발 하나만으로도 독립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A 신호기는 잠수 작업 중이므로 다른 선박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저속으로 항해하라는 뜻이다. B 신호기는 위험물을 싣거나 하역 또는 운송 중임을 알린다.
O 신호기는 사람이 바다에 빠졌다는 의미이며, V 신호기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국제해상신호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선박의 안전과 구조 활동을 위한 통신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다만 군함이 축제나 기념행사에서 신호기를 연속으로 게양하는 만함식에서는 개별 깃발의 통신 의미보다 의전과 축하의 목적이 우선한다.
군함의 만함식은 언제 시작됐을까
선박에 여러 깃발을 게양하는 전통은 범선 시대의 해군 의전 문화와 관련이 깊다.
과거 유럽 해군에서는 국왕의 방문이나 국가적 경축일, 함대 행사 등을 기념하기 위해 군함에 다양한 깃발을 게양했다.
이러한 관행은 현대 해군에도 이어져 국가 기념일, 해군 창설 기념행사, 국제 관함식, 외국 군함의 친선 방문 등에서 볼 수 있다.
만함식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수와 함미 사이를 연결하는 선을 따라 여러 신호기를 게양한다. 다만 실제 배열 순서와 게양 방법은 각국 해군의 의전 규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한 항해 중이거나 작전 상황에 있는 군함에서는 안전과 임무 수행을 고려해 이러한 장식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한민국 해군도 국제 관함식에서 활용
대한민국 해군 역시 관함식과 주요 기념행사에서 만함식을 실시한다.
특히 국제 관함식에서는 여러 나라의 군함이 함께 참가하기 때문에 각국의 국기와 군함의 신호기 장식이 어우러져 화려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때 구별해야 할 것은 국기, 해군기, 함정의 의전용 깃발, 국제해상신호기다.
국기는 해당 선박의 국적을 나타내며, 해군기와 의전용 깃발은 국가별 해군의 제도와 전통에 따라 사용된다. 반면 국제해상신호기는 국가가 달라도 공통된 통신 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따라서 군함에 걸린 수십 개의 깃발을 모두 다른 나라의 국기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첨단 통신 시대에도 깃발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현대 군함은 위성통신, 디지털 데이터 통신, 암호화된 전술통신체계 등 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해상 신호기는 여전히 사용된다.
전파를 사용하지 않고도 시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고, 특정 상황에서는 간단한 의사소통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군에서는 깃발이 군사적 통신 수단인 동시에 전통과 규율, 국가적 의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군함에 걸린 형형색색의 깃발은 멀리서 보면 단순한 축제 장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범선 시대부터 이어진 해군 문화와 선박 간 의사소통을 위한 국제적 약속이 담겨 있다.
결국 군함의 만국기가 서로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갖는 이유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서로 다른 정보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전달하기 위해 발전한 역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